열아홉살의 나에게
며칠전 열여섯살이었던 내가 나에게 다짐하듯 쓴 글을 보았어. 그 글에는 내가 선택한 길이 옳다고 믿고 꿋꿋하게 가보자고 써있었지. 그 때의 그 길이 무엇이었더라. 생각이 나질 않아. 어린 내가 나의 길이라고 점찍어 놓을 정도로 두근거렸던 반짝임은 대체 어디서 본걸까?
열아홉살이 되고서 한동안 우울함에 젖어있었어. 긍정의 끝을 달리던 내가 밑도 끝도 없는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지다니! 난 이미 내가 우울함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에서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지. 그 우울함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원인을 찾기 위해 곰곰히 생각해봤어. 뭘까? 날 옭아매는 이 것. 그래 부담감이었어. 수험생이라는 부담감. 수험생이 되었다고 공부를 특별히 더 하는 건 아니야. 그 동안 쾌락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활을 해왔고 그걸 한순간에 바꿀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깐. '남들하는만큼이라도 해야지'란 생각은 왠지 촌스러워 보였고, 분명 나와 남은 다른데 거기에 맞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. 그래서 공부도 하지 않았지. 그런데 그 오만한 생각이 의외로 나에게 부담감을 심어준거야. 안해도 잘 해야돼- 같은. 그 누구도 지워준적 없는 짐이었지만 나의 치기가 지워주게 된 것이지.
원인은 알았어. 알았는데, 벗어나는 방법은 몰랐어. 공부를 하면 되겠네! 라고 할만큼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거든. 난 여전히 공부를 할 생각이 없었고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게 스트레스가 되버리자 극도의 불안감이 내 뒷목을 뻐근하게 했지. 그걸 이길 수 없던 약한 나는 더욱 더 쾌락의 늪에 빠져버렸어. 밤낮으로 컴퓨터에 빠져있고, 시간만 나면 전국단위로 친구들을 만나러 가고, 수업시간에는 지난 밤 늦게까지 한 컴퓨터 덕에 몰려오는 피곤함에 고개를 떨구고. 하고 싶은건 다 하고 즐길건 다 즐기면서도 자꾸만 예민해지는 통에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사소한 말한마디도 담아둬버렸지. 평소엔 둔감 그 자체였으면서. 그래, 변하고 있었던거야. 나태함으로 점철된 몇달간의 생활이 나를 변하게 한거지. 날카롭고 무기력한, 게다가 공부 조차 안하는 열아홉살로 말이야.
그렇게 엉망진창인 나로 또 똑같은 하루를 보내던 중 지저분해진 방정리를 하다가 예전 일기를 보았어. 그 일기 안에는 내일에 설레는 열여섯 소녀가 담겨있었지. 꿈에 반짝거릴 매일을 소망하는 열여섯살의 나 말이야. 순간 눈이 확 띄이더라. 지금의 나는 반짝거리긴 커녕 동태눈깔보다 탁해져있잖아? 어쩌다 내가 또 나를 버렸던걸까? 밀려오는 물음 속에서 나는 그 끝을 놓지 않고 다시 결심했어. 열아홉의 시작은 마음까지 추웠지만 봄은 분명 누구보다 따뜻하게 하겠다고.
항상 하는 말이 있어. 치열한 인생을 살진 않더라도 너덜너덜한 인생을 살고 싶다는 말.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한 얘기를 듣고 좌우명처럼 새긴 말이야. 내 앞에 닥쳐오는 일을 피하지 않고 너덜너덜해질만큼 정면으로 맞닥뜨릴 수 있다면 분명 나는 내 길을 걸어나갈 수 있을거야.
아직도 열여섯의 내가 선택한 길은 생각나지 않아. 그렇지만 열아홉의 내가 다시 내딛은 길에서는 꿋꿋하게 가고 싶어.
그래, 벌써 봄이야. 곧 꽃이 피고 꽃이 떨어지고 땅이 젖고 또 나뭇잎이 떨어지고 그렇게 다시 겨울이 오겠지. 그 겨울의 나는 차가운 바깥의 날씨마저 녹일만큼 따뜻한 안의 날씨를 갖고 있기를 바래. 바로 열아홉살의 내가 말이야.


